[펌] 오늘의 무협용어 28. 소림사-역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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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무협용어 28. 소림사-역사편 - 웹소설 연재 마이너 갤러리

(이연걸 따거... 오래오래 건강하세요....ㅠ)오랜만에 돌아왔다.자꾸 내 디씨 글에 저격 들어오는 놈 때문에 빡쳐가지고 안쓴지 1년이 다 되어가네.그러다 요즘 웹연갤에 무협 자료 붐(?)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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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걸 따거... 오래오래 건강하세요....ㅠ)

 

오랜만에 돌아왔다.

 

자꾸 내 디씨 글에 저격 들어오는 놈 때문에 빡쳐가지고 안쓴지 1년이 다 되어가네.

 

그러다 요즘 웹연갤에 무협 자료 붐(?)이 일어나는 거 같아서 다시 써봄. 반고닉도 파봄.

 

오늘은 무협하면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태산북두, 소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함.

 

소림사 편은 역사편, 무협편, 무공편 이렇게 3화로 나눠서 올릴 생각임.

 

참고로 오랜만에 돌아왔지만 역사편이라서 지루할수도 있음. 미리 경고 박고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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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는 하남성 등봉시 숭산 소실봉 소림사)

 

1. 기원

1) 소림사의 기원

소림사는 495년 전후, 북위의 효문제가 인도에서 건너온 발타 선사를 위하여 숭산에 창건했다고 전해짐.

 

예전에는 달마 대사가 창건했다는 전설도 내려왔지만, 여러가지가 밝혀진 지금은 발타 선사가 창건한 소림사에 달마가 묵으면서 수행했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음.

 

물론 달마 자체가 전설에 가까운 존재라서 실존 유무를 가리기엔 애매하긴 함.

 

어떤 설에는 달마가 중국에 왔을때 소림사라는 절이 없다고도 하는 이야기도 있음. 달마가 480년에 이미 중국에 있다가 495년에 떠나서 497년으로 추정되는 소림사랑은 관련이 없다는 게 그 주장임.

 

뭐 혜가를 비롯해 그 뒤로 달마의 제자들이 선종을 전파했으니 달마의 가르침은 전해졌다 라고 하면 말은 되긴 하겠지.

 

(1) 초대 주지 발타 선사

불타, 혹은 발타 선사라고 불리는 인도의 고승이 동료 5명과 함께 수행을 했는데 동료들은 다 깨달음을 얻는 동안 혼자만 깨달음을 얻지 못함.

 

깨달음을 얻은 다른 5명의 동료가 '너는 인도에선 인연이 없나보다. 중국으로 가봐. 거기선 되겠지.'라고 권해서 발타는 중국으로 떠남.

 

당시 중국은 남북조로 갈려서 북쪽은 탁발 선비(모용세가의 시조인 모용 선비랑은 다른 선비족)독의 나라인 위나라가 지배하고 있었음.

 

위나라가 5호 16국을 통일해 북쪽을 지배하고 불교를 우대해주면서 내정을 다지고 있었음.

 

당시 남쪽 불교는 이론파였고, 북쪽 불교는 참선과 명상을 중요시하는 쪽이었는데, 발타는 북쪽이랑 잘 맞아서 북위의 황제 효문제가 발타를 환영해줌.

 

효문제는 발타 선사에게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건물도 막 지어줌. 여기가 아직 소림사는 아님.

 

(2) 소림사 창건과 이름의 의미

나중에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했을때 발타 선사를 데리고 갔는데, 발타 선사가 조용한 곳에서 수행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숭산의 소실산(혹은 소실봉)에 사원을 짓고 그곳의 주지를 맡겨 버림.

 

당시엔 보통 승려들이 수행하는 곳을 총림(總林)이라고 불렀는데, 소실산에 있는 총림을 줄여서 소림이 된거임.

 

절대 작은 숲 뭐 이런 의미 아니니깐 소림사 이름 가지고 설정 놀이 할때 주의하도록.

 

(3) 2대 주지 초우선사, 소림 무술의 창건자

최근 중국 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소림 무술의 창건자는 달마가 아니라, 초우 선사라는 설이 있음.

 

https://weekly.donga.com/3/all/11/65455/1 기사 링크

 

자세한 건 여기를 참고하면 되지만, 요약하자면,

 

예시아 사원(현 안양현의 운문사라고 추정하는데 정확히 알려진건 없음)에서 무술을 단련하던 무승인 그가 33살에 소림사에 들어가고,

 

훗날 발타의 뒤를 이어 2대 주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소림사에서 무승이 양성되는 시초가 되었다는 것.

 

이렇게 보면 죽은 초우 선사가 벌떡 일어나 달마 멱살 잡아도 이상할 게 없네ㅋㅋ

 

2) 무술의 기원, 소림사

무술, 무공의 기원이 소림사라고 말하는 건 어렵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림 문파 중에 가장 기원이 오래된 문파 중 하나가 소림임.

 

소림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 시기에 장로의 오두미교(천사도)를 기원으로 삼는 청성파 정도인데,

 

청성파가 무술을 한다는 건 역사적 사실에는 없고 애초에 천사도 자체가 청성산을 떠나 수당시대 도교의 메인이 된 종파라서 그냥 종교 단체로 생각하면 됨.

 

지금처럼 무림 문파로 청성파의 클리셰가 잡힌건 무협 소설에서 그 명성을 가져다 쓰면서 생긴 거임.

(자세한건 나중에 청성파 이야기 하면서 자세하게 논하기로 하자.)

 

어쨌든 5세기에 처음 창건된 소림사이니 당연히 (실존했던) 무림 문파 중에는 역사가 김.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이 소림사에서 무공을 수련했을 거고, 속세로 내려갈 자격을 얻은 무승들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비슷한 절, 혹은 도장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됨.

 

그 결과 각기 다양한 유파의 전통이 수립되고 미세한 부분이 바뀌어가면서 무술의 분파가 갈라져 나갔을 거임.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중국 무술 전문가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거임.

 

 

2. 소림사의 무승 역사

지금부터는 소림사의 창건 이후 무승의 역사를 적어볼까함. 속고승전이라던가 여러 사료에서 긁어오고 정리한 내용임.

 

아니 무협 소설 자료 쓰는데 왜 역사를 배워야해? 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긴 한데,

 

영화나 무협 소설에서 만들어진 소림사의 이미지는 이런 무승들의 활약이 반영된 거기 때문에 쓸데없지만 알면 도움이 되는 지식임. 암튼 그럼.

 

(1) 십삼곤승구당왕

소림이 창건되고 약 100년이 지났을 무렵.

 

소림을 후원해준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나눠지고 서위가 북주로 바뀌어 다시 통일한 뒤, 북주의 장군 양견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나라를 세운 뒤 전국을 통일하게 됨.

 

그리고 수나라가 고구려한테 발려서 국운이 기울고 당나라가 세워짐.

 

아버지 고조 이연이 나라를 세우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아들 이세민은 아버지의 견제와 의심, 그리고 다른 공신들의 견제를 이겨내며 황태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었음.

 

당연히 자신의 힘이 되어줄 세력이 절실하던 때였지.

 

620년 전후로 이세민은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고 당나라와 대립하던 진왕 왕세충과의 싸움에서 소림사의 무승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됨.

 

이세민의 요청에 응답한건 단 13명의 무승이었음.

그런데 이 무승들이 어벤져스였던 거임.

 

단 13명으로 왕세충의 부하인 장군 왕인칙을 사로잡아버리고, 핵심 인력인 왕인칙이 잡히자 전세가 불리해진 왕세충은 이세민한테 항복하게 됨.

 

이세민은 이 공으로 당나라의 전국 제패의 1등 공신이 될 수 있었음.

 

훗날 당 태종이 된 이세민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소림사에 '천하제일관'이라는 명칭을 부여할 정도였음.

 

실제 역사에서 소림사 무승이 드러나게 되는 첫번째 사건이었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소림사, 즉 최초의 무림 문파가 명성을 얻고 힘을 기르게 된 게 '관에 대한 협력'이라는 점임.

 

일반적으로 무림과 관은 서로를 무시한다는게 일반적인 클리셰지만, 소림은 그 명성의 시작부터 관이랑 엮여 있었고, 훗날 소림의 무술이 발전하는 것도 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

 

다른 문파는 몰라도 소림은 관과 매우 관계가 깊은 문파라는 것.

 

(2) 소림사의 1차 몰락과 긴나라왕

명나라 초기 작가 부매가 쓴 숭서와 건륭제 때 발간 된 《등봉현지登封縣志》의 《고승전》에 나온 기록임.

 

시기를 훌쩍 건너 뛰어 원나라 혜종 원년(1341년),

한 승려가 소림에 도착했는데, 봉두난발에 반쯤 벌거벗었고, 맨발이었다고 함. 이 승려는 수년 동안 바느질을 하고 부엌일을 하며, 적은 돈을 받고 밥을 지으며 불목하니 노릇을 했음.

그는 아침저녁으로 과묵했고 시간이 나면 좌선을 하기 바빠 아무도 그 이름을 알 수 없었음.

 

11년이 지난 뒤(1352년), 영주의 홍건적이 소림으로 쳐들어옴. 불상의 금박을 벗기고 불상 안의 보물(복장유물)을 찾기 위해 불상을 모두 박살내버림.

승려들이 모두 도망가고 홍건적의 난이 끝날 때까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을 정도로 소림사의 타격이 컸음.

 

이때 이름을 알 수 없던 그 승려는 철곤을 들고 나왔는데 곤봉이 수십 장으로 커져서 홍건적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함.

이때 이 무명승이 자신을 긴나라왕이라고 외쳤다고 함.

팔부천중의 하나인 긴나라왕, 즉 가릉빈가는 이후 소림 승려 중에서도 무승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음.

 

긴나라왕이라고 자칭한 무명승은 도법, 창법, 곤봉, 검극, 초겸(낫), 쌍도, 쌍월(도끼), 대곤 등의 무예에 뛰어났다고 하며,

훗날 이 전승을 이은 [긴나라병법]이라는 권보와 노래가 전해져 내려왔고, 소림 무승들은 무명승을 이배야二輩爺(2대째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존경해온다고 함.

 

흔히 소림사 하면 곤법을 많이 묘사하는 데(특히 중국 무협 영화에서) 그 시초가 이 무명승이라는 전설임.

 

(3) 월공대사와 30승병

이번엔 명나라 시기의 역사임.

가정 32년(1553) 중국 동남부 화남에 36명(혹은 53인, 72인)의 왜구들이 침범함.

얼마 뒤에 임진왜란을 겪을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명나라도 왜구의 침략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음.

 

역사서에서 평하길 왜구들은 매끄럽고 지모가 있고 용맹했으며, 전투를 잘해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을 정도로 무공이 강했었음.

(흔히들 무협에서 왜구들 나올때 외공이 강하다고 평가하는 걸 생각하면 고증이 잘 된 걸 지도?)

 

여튼 이런 강한 왜군을 상대로 900이 넘는 명군이 맞서 싸웠지만, 왜구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전멸함.

 

그때 낭씨 부인이 이끄는 광서성의 소수민족 용병(6,872명?이라는 추정치가 있음)들이 맞서 싸웠지만, 소수민족을 고깝게 여겼던 한족 관리들의 비협조로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음.

 

이에 도독 만표(혹은 순안어사 채가천)가 격문을 보내 소림 승병 30명(혹은 100여명)을 소집해 왜구에 맞서 싸우게 함.

 

소림 승병의 대장인 월공화상은 철곤을 들고 왜구와 싸웠으며 왜구를 물리쳤지만,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맘. 30승병은 정말 처절하게 싸웠으며 훗날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고 함.

 

문제는, 이 무승들의 전멸로 소림 무술의 맥이 끊기게 됨.

이후 소림의 무술은 실전되고 어설픈 무술들만 남아 나중에 명나라 장군인 유대유와 척계광이 군부의 무술을 전해주는 계기가 됨.

 

즉, 16세기 이후의 소림 무술은 맥이 끊기고 군부의 무술을 얻어 쓰게 됐다는 것.

여기서도 소림과 관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무공편에서 다시 쓸게.

 

(4) 강희제와 소림의 종말

이번엔 청나라임.

1674년, 강희제는 소림사의 무승들을 소집함.

 

그 이유는 명성이 자자한 소림사의 무승의 실력을 보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지를 알기 위해서였고

한편으로는 이미 망한 명나라에 우호적인 성격인 소림사에 대한 견제 의미였음.

 

강희제가 무승들의 실력을 보는 자리에서, 무승 한 명이 단련한 병사 7~10을 단번에 쓰러뜨리는 괴력을 발휘했다고 함.

오죽하면 강희제가 '내게 이러한 무승 천 명만 있어도 천하를 얻으리라'며 감탄했을까.

 

소림 무승의 실력에 감탄한 강희제는 128명의 소림 무승을 장교로 선발해 서루, 즉 티베트 원정에 참여 시킴. 당연히 승병들은 엄청난 활약을 함.

전쟁에서 승병들이 공을 세운 후, 강희제는 소림사에 각별한 애정과 후원을 보냄.

 

하지만 이런 강희제의 총애를 질투하고 견제한 하남성의 간신들이 소림이 반청복명 세력과 연결되어있다고 이간계를 펼침.

실제로 반청복명이랑 연관되었는지, 아니면 소림사의 세력이 커지는 걸 경계한 강희제가 일부러 연극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강희제는 소림사의 힘을 두려워해 소림사를 해체시키려고 함.

 

이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병이 소림사를 불태워 113명을 불타 죽게 하고, 10명을 전사시켰다고 함.

하남성의 간신 세력이 합류한 강희제의 군대가 수개월 동안 소림사를 공격했고, 결국 소림사는 파괴당해서 불타버림.

 

전설에 따르면 살아남은 승려가 5명인데 이들을 소림오로라고 부르며,

소림오로는 몰래 강남으로 도망쳐 비밀조직을 세움.

 

복건성에 세운 새로운 소림사를 남소림사라고도 하며, 훗날 삼합회의 기원이 되는 조직이라고도 함.

 

물론 남소림사와 소림오로는 어디까지나 전설이긴 한데, 중국애들이 이 전설에 환장을 함.

 

영춘권, 홍가권 등등 온갖 무술의 시조를 이 소림오로에서 왔다고 갖다 붙이고, 심지어 황비홍도 그 계보를 따라가면 소림 오로의 계파라고 주장함ㅋㅋㅋㅋ

(남소림에 대해서도 언제 한번 정리 해보도록 할게.)

 

여튼 관이랑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이 있던 소림이 관의 손에 의해 멸문당한 건 후대의 무림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을 거라고 생각함.

그래서 무협 소설의 클리셰인 관과 무림은 불가침의 관계라는 것이 소림의 멸문에서 온 교훈일 지도 모름.

 

관에 너무 얽혀버려서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멸문을 당한 소림의 역사가 있으니까.

 

여튼 실질적으로 소림을 멸문시킨 청나라 때문에, 중국의 소림사를 무대로 한 영화에서 적은 죄다 청나라임.

 

3

한때 주호민 진심 각성모드라고 불렸던 소림사 18동인도 명나라 장군의 아들인 주인공이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워 청나라 장군한테 복수하는 내용임ㅋㅋㅋㅋㅋ

 

관이 소림을 핍박하고 소림의 무승이 힘든 시련을 이겨내고 무승이 되어 복수를 이룬다, 라는 내용이 중국쪽에선 가장 유명한 소림 클리셰인거지

 

주로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쪽 무협은 이러한 클리셰를 거의 못살린다고 봐야 함.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네.

 

다음편은 소림사 무협편으로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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